이상이 현실을 이끌어야 한다

“Such widespread phenomena as depression, aggression, and addiction are not understandable unless we recognize the existential vacuum underlying them. Ever more people today have the means to live, but no meaning to live for.” - Viktor Frankl <Man’s Search of Meaning>

“우울증, 공격성, 중독과 같은 이처럼 널리 퍼진 현상들은 그 밑에 깔린 실존적 공허를 인식하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단을 가지고 있지만, 살아갈 의미는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언젠가 이 글을 읽었다. 이글을 인용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현명한 삶의 중심 원칙 중 하나는 이상주의가 실용주의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상이 현실을 이끌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청구서, 건강 문제, 가족의 요구와 같은 삶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루어야 하지만, 이상은 항상 북극성처럼 있어야 합니다. 그 북극성이 삶의 방향과 분위기를 결정하니까요.” 그것을 읽으며 나의 이상과 꿈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평생 물었을 것이다. 나의 이상은 무엇인지. 나의 북극성은 어디에 있는지를.

사실 글을 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내가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는지, 무엇을 관찰했고 그것이 마음에 남았는지 아닌지, 내가 바라보는 현실의 모양과 색깔은 어떠한지, 인간들의 모습과 우리의 역사와 우리가 가진 것, 그리고 잃어버린 것들을 알아내기 위하여…

그것은 글을 쓰지 않는 한 명료한 생각과 가치관을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알고 있지 하며 뭉뚱그리고 넘어가는 것과 명료하게 글로 표현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를 만드는 것이기도 해서다. 그냥 보는 것과 관찰하는 것, 보고 들은 걸 생각하는 것, 그걸 말하는 것과 글로 남기는 것의 각각에는 뛰어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생각의 줄기는 수없이 새겨진 글들 사이에서 조금씩 윤곽이 드러나는 거니까.

그러다 보면 내가 바라는 나의 이상, 나의 북극성도 조금은 선명해지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나의 현실은 척박했다. 척박함을 이기려면 아름다운 이상이 필요했지만, 생각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수많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나는 빛을 따라가며 살고 싶기에, 내 삶의 방향을 바로 잡고 싶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