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이 현실을 이끌어야 한다

“Such widespread phenomena as depression, aggression, and addiction are not understandable unless we recognize the existential vacuum underlying them. Ever more people today have the means to live, but no meaning to live for.” - Viktor Frankl <Man’s Search of Meaning>

“우울증, 공격성, 중독과 같은 이처럼 널리 퍼진 현상들은 그 밑에 깔린 실존적 공허를 인식하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단을 가지고 있지만, 살아갈 의미는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언젠가 이 글을 읽었다. 이글을 인용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현명한 삶의 중심 원칙 중 하나는 이상주의가 실용주의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상이 현실을 이끌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청구서, 건강 문제, 가족의 요구와 같은 삶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루어야 하지만, 이상은 항상 북극성처럼 있어야 합니다. 그 북극성이 삶의 방향과 분위기를 결정하니까요.” 그것을 읽으며 나의 이상과 꿈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평생 물었을 것이다. 나의 이상은 무엇인지. 나의 북극성은 어디에 있는지를.

사실 글을 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내가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는지, 무엇을 관찰했고 그것이 마음에 남았는지 아닌지, 내가 바라보는 현실의 모양과 색깔은 어떠한지, 인간들의 모습과 우리의 역사와 우리가 가진 것, 그리고 잃어버린 것들을 알아내기 위하여…

그것은 글을 쓰지 않는 한 명료한 생각과 가치관을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알고 있지 하며 뭉뚱그리고 넘어가는 것과 명료하게 글로 표현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를 만드는 것이기도 해서다. 그냥 보는 것과 관찰하는 것, 보고 들은 걸 생각하는 것, 그걸 말하는 것과 글로 남기는 것의 각각에는 뛰어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생각의 줄기는 수없이 새겨진 글들 사이에서 조금씩 윤곽이 드러나는 거니까.

그러다 보면 내가 바라는 나의 이상, 나의 북극성도 조금은 선명해지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나의 현실은 척박했다. 척박함을 이기려면 아름다운 이상이 필요했지만, 생각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수많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나는 빛을 따라가며 살고 싶기에, 내 삶의 방향을 바로 잡고 싶기에…

과거는 진실이 아니다

과거는 진실이 아니다. 현재가 물러난 모든 과거는 현재의 자신이 재해석한 또 다른 현실이다. 그 현실은 (스스로는 객관적 진실이라 믿지만) 과거의 영광과 부끄러움이 재조직되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과 망각된 것은 탈락되고, 드러내고 싶은 것과 현재의 해석은 덧붙여져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한다. 우리는 모두 과거를 명료하게 기억하고 있고, 가감 없이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단 한 번도 진실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어느 과학자의 말대로 우리는 시간을 정의할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인지의 한계와 무한한 상상력, 망각이란 요술로 과거는 끊임없이 재조직되고 재편집되어 드러난다.

옛 영광을 떠올리며 흐뭇해하는 중년 남성의 추억도, 전생애를 돌아보며 자서전을 써내려가는 죽음을 앞둔 노인의 더듬거림도 약간의 사실과 약간의 상상, 탈락된 부끄럼과 덧붙여진 영광이 뒤섞여서 만들어낸 하나의 이야기에 가깝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존재로 자신의 과거까지 다양한 갈래의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다.

과거는 이야기로 보면 흥미로운 문학이 되고, 다큐멘터리로 보면 한없이 따분한 거짓부렁이 된다.

관심과 신뢰를 얻으세요

Earn attention and trust. Spend time and money on that, and the rest will take care of itself. - Seth Godin 관심과 신뢰를 얻으십시오. 그것에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출처

세스 고딘은 말했다. 어떤 자산을 얻을 것인가? 얻는 목적은 무엇인가? 누가 위험을 감수하고 이익을 얻는가? 그 질문은 간단하면서도 무겁다. 공간(메인 스트리트)을 통해 쉬운 관심을 얻는 대신 고정비와 유지비 등 리스크를 떠안는 일쉽게 관심을 얻기는 어렵지만 관계망(구독자, 팬)을 통해 경험을 선사하여 관심과 신뢰를 축적하는 일 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무엇을 하고자 하며 왜 하는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하는 이유다. 방향이 없으면 늘 휘청일 수밖에 없다.

관심과 신뢰를 얻는 일은 꾸준하고 오랫동안 묵묵하게 걸어가는 인생길의 동료를 얻는 일이다. 자기 개성을 잃지 않고, 인간다움을 지키고,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과 익숙함, 그리고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매력을 꾸준하게 표출하는 일이다. 그러려면 이게 어떻게 비춰질까를 의식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스스로에게 약속한 것을 꾸준하게 해나가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한다. 마케터인 세스 고딘은 비즈니스와 마케팅에 대해 말한 것이겠지만, 나라는 사람 그 자체는 시장의 상품과는 달라서 조금 더 스스로에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오래전에 관심과 신뢰를 잃었다. 십수 년간 블로그를 했고 글을 썼지만, 늘 패배에 머물렀으므로 지켜보던 사람들은 지쳐서 하나둘씩 떠났다. 나는 어쩔 수 없는 나를 붙들고 여전히 분투중이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사람들은 고난을 이겨내고, 자기만의 서사를 쌓고, 자기 개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사람에 매력을 느끼지, 늘 고단한 사람에게는 싫증을 느낄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나를 지킨다. 조금 더 건강하고 맑은 정신을 소유하기 위해서. 세스 고딘의 말대로 탄탄한 사회 관계망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 전에 건강한 몸과 정신이 먼저이니까. 조금이나마 스스로를 건져내야 한 개인으로도, 비즈니스맨으로도, 콘텐츠 제작자로서도 중요한 지점에 도달할 출발점에 설 수 있을 테니까.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이다라는 생각

Ⅰ 문제의 시작

어느 날 인간은 하나의 질문과 조우한다.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이다.” 한 번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하면, 주기적으로 그것은 눈앞에 등장한다. 어떤 때는 무의미의 모습으로, 때로는 고통의 형상으로, 가끔은 슬픔으로. 아지랑이처럼 피어난 질문은 심장에 박힌 대못처럼 죽기 전까지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 지옥의 형벌처럼 따라다닌다. 청춘의 시기에는 알 수 없다. 인생 도처에 그토록 괴로움이 만연한지를, 또 기쁘고 행복한 순간은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기적 같은 순간이라는 것을.

현실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철장에 놓인 감옥이다. 타고난 운명은 바꿀 수 없고,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괴로움과 무의미의 공허함에 시달릴 뿐이다. 어느 날 문득 든 ‘인생은 무의미하다’라는 생각은 다리를 묶는 질곡과 손목에 묶인 수갑 등 전신을 휘감는 오라가 되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어떤 질병의 발현, 헌신을 다했던 직장에서의 실직, 가족의 질병이나 사고, 폐업 등에서 시작된 슬픔, 모든 걸 바쳐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 끝내 꿈을 실현시킬 수 없다라는 자각에서 오는 허기가 포함된다. 이런 생각은 대체로 교통사고 같은 급작스럽지만 우발적인 사고에 의해 생성되며, 그때 비로소 인간은 철학을 하기 시작한다. ‘왜 나한테만’ 라는 질문을 묻기 시작하는 것이다.

Ⅱ 문제의 지속

인생은 롤러코스터 같아서 인생살이에서 문제는 모습만 바뀌어가며 등장하기 마련이다. 언젠가는 이별에 힘겨워하고, 언제는 가족이 겪는 고통 때문에, 또 다른 때에는 갑자기 발병한 병에, 느닷없던 사고에, 믿음의 배신에, 실직과 실패에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것이다. 물론 인생의 초기에는 인생의 밝은 측면을 굳건히 믿고 있었을 수 있고, 해낼 수 있고 바꿔낼 수 있다고 믿지만, 인생에는 도저히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 혼자서는 아무래도 안 되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굳건했던 멘탈에 조금씩 금이 가고, 건강했던 몸이 낡아가고, 버티거내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사실을 직면하면서 인간은 약해진다. 인간은 몸만 늙지 않는다. 정신도 낡고 헤질 수 있다.

Ⅲ 인내의 극한

점점 인내하기 힘들어진다.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났지? 나는 왜 이런 일을 당해야만 했지?와 같은 생각은 인내심을 갉아먹는 좀과 같다. 실직해서 막막하고, 꿈을 못 이뤄서 허망하고, 헤어져서 슬프고, 사고나서 힘들고, 믿던 이들에게 배신당해 괴롭고… 그런 일들이야 수도 없이 늘어놓을 수 있지만, 진정한 문제는 그런 일들은 끝없이 이어져 오는 데 반해 그것을 견디고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변화한 삶의 조건들을 새로운 기본값으로 생각하며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데 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토피가 있었다. 남들과는 다른 최중증의 아토피였고 면역질환들로 평생을 고통받았다. 눈 수술을 하고 약이 병을 부르고 병이 약을 부르는 굴레 속에서 청춘을 허비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그렇게 시작된 온갖 트라우마들로 늘 괴로웠다. 내가 당면한 현실 조건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병마를 이겨낼 수 없고,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도 없는 그 절망의 늪은 어릴 때 나를 괴롭히던 정신의 병이었다. 그럼에도 30대가 되면 나아질 거야, 신약이 나오면 좋아질 거야, 40대가 되면… 이런 생각을 끝없이 했다. 미래에는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 그 생각이 나를 살게 했다. 그러나 고통은 모습을 바꿔서 나를 찾아왔고, 이와 비슷한 일은 끝 간 데 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인생의 대부분은 고통일 수밖에 없고, 행복하고 즐겁게 만드는 일은 아주 드물게 우리를 찾아오는 기적 같은 순간이라는 것을. (그래서 행복한 순간이 더 소중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Ⅳ 변화의 시작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단 하나 밖에 없다. 인생은 고통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 바로 그것이다. 현실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내가 한국에서 태어났고 현재의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며, 면역질환을 평생 앓았고 지금도 앓고 있으며, 보통 사람이 할 만한 경험의 대부분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지금 아프다고 느끼는 감각, 그마저도 혼자 견뎌야 한다는 고독, 그럼에도 돈을 벌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은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다만 그 생각, 지금 내가 이런 현실에 처해 있고 앞으로도 달라지기 어렵다는 그 생각만은 바꿀 수 있다. 아주 뻔하지만 그래서 진실인 말은 생각을 그곳에서 꺼내오는 일인 것이다.

Ⅳ 가치관의 습관화

모든 건 변화한다. 달라진다. 태어나면 죽고, 죽은 자리엔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변화할 수 있다. 현실은 바꿀 수 없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생각은 바꿀 수 있다. 그 방법은 연습이다. 한 번에 모든 걸 바꿀 수는 없다. 연습이 필요하다. 연습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가치관을 바꾸고,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를 바꾼다. 습관만이 지독한 현실에서 인간을 무너뜨리지 않는 굳건한 지지대가 된다.

생각과 감정은 쉽게 변한다. 자고 나면 달라지고, 다른 행동을 하면 달라진다.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들고, 슬픔에 빠지는 순간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외면하는 것이 아닌 잠깐의 전환으로 심각한 부정적 사고와 감정에서 멘탈을 구출하는 것이다. 부정적 감정에 자주 빠져든다면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방 청소를 하거나 산책, 샤워, 요리, 통화 등을 해보자. 현실의 괴로운 문제들로 짓눌려 있던 멘탈이 잠시 환기의 시간을 가지게 되면 많은 것이 달리 보인다. 그래서 힘들 때 일을 더 열심히 해서 잊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물론 문제를 외면만 해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하지만 멘탈의 균형을 되찾고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것과 어느 한쪽으로 과도하게 쏠려 있을 때 그 감정들을 무시하고 문제에 달려드는 것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너무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 있거나 기쁜 나머지 들떠 있을 때는 냉정을 찾기 어렵고 제대로 문제를 파악하거나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소간 부정적 감정들을 해소하고 기분을 전환하고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린 후에 문제를 바라볼 때에는 자신이 세상을 보는 렌즈를 깨끗이 씻은 후에 보는 것이기 때문에 달라진다. 모든 건 어떤 렌즈로 세상과 나를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고, 내 감정과 생각에 휘둘리느냐 나 자신이 컨트롤 하느냐의 싸움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바꿀 수 없는 부분도 존재한다. 나의 경우는 내 몸이다. 아토피로 시작된 여러 질환에 몇십 년 짓눌리며 지내다보니, 그리고 해결할 수 없는 다른 문제들을 숱하게 만들어낸 것에서 도대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때로는 너무 아파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고, 그 무엇도 지금 내 현실을 바꿀 수 없음에 좌절을 느끼기도 한다. 다만 그 생각에 오래 붙잡히지 않으려 하는 것, 그런 생각이 습관이 되고 가치관이 되도록 두지 않는 것만이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생각한다.

좋은 유전자를 받고 태어나서, 좋은 환경에서 저들은 괜찮은 거고, 나는 불운한 운명을 타고나서 이런 사고를 당하고 괴로움을 겪는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그것이 오래되면 생각이 굳어져 습관이 되고 가치관이 된다. 인간을 믿을 수 없고, 패배주의적 사고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자조적인 마인드는 불만과 불안을 키우고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낸다. 자신은 자각하지 못하지만, 생각이 자신을 끝없이 망가뜨리고 있는 것으로 마치 독약을 스스로 들이키는 것과 같다.

지독한 현실이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생각마저 인간을 무너뜨리게 둘 수는 없지 않을까.

나를 위한 시간

“단 90초도 저를 위해 요리를 한 적이 없습니다.”

  • 최강록 요리사, <흑백 요리사 2>의 결승전에서.

그 말이 이후 “그런 저에게 이런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라는 말이 이어진다.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해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걸 맞춰주고, 누군가의 슬픔에 공감하고 위로할 줄은 알면서도 스스로를 위한 위로는 뒷전에 둔 채 살아가던 나에게도 작은 울림을 주던 회차였다. 전국에 계시는 모든,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찬가와 같은 말들.

돌아보면 일과 생활 어디에서도 진정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이 없었다. 일은 늘 남의 일을 해주는 것에 그쳤고, 좋은 관계를 맺어야 일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고충을 듣고, 근심과 슬픔을 나누는 것도 모두 타인을 위한 일이었다. 그러다 연말과 연초, <흑백 요리사2>를 보며 나는 무엇에 목숨을 걸고 있는가, 목숨을 내어주어도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위한 시간은 정말 있었나 하는 질문들이 계속 입속을 맴돌았다. 아프고 괴롭고 힘든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나 자신의 진짜 마음을 들여다 보고 진짜 나로 거듭나기 위한 시간을 보냈어야 하는 것이 맞았다. 아픈 것을 해결하기 위해, 일을 조금 더 잘 하기 위해,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너무 많은 ‘척’을 하며 살았다. 최강록이 말했던 바로 그 ‘척하는 인생’ 이 내게도 있었다. 늦었다면 늦었지만, 이제라도 조금 외피는 걷어내고 순수한 열정을 쏟아붓던 요리사들, 셰프들처럼 나도 조금 더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려고 노력해보자 했던 시간이다.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는 것

어느 날 문득

어느 날, 당신은 아무도 진짜로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그리고 당신이 원했던 건 뭐든지 할 수 있었단 걸 알게 될 거야. one day, you will realize that no one was really watching, and you could have done whatever you wanted

멋부리려 하지마

멋 부리려 하지 마라. 네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괴짜처럼 집착하라. 열정은 무관심보다 너를 더 먼 곳으로 데려다 줄 테니까. stop trying to be cool. be nerdy and obsessive about the things you love. enthusiasm will get you farther than indifference.

세상에 태어난 지 오래지 않은 시절에는 아무것도 몰라서 부모님이 세상의 전부가 되지만, 오랜 세월을 살다 보면 다 안다고 착각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는 순간, 그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나 또한 한때 이런저런 책을 읽고, 사회에서 여러 일을 겪으며 조금은 세상은 안다고 생각했고 남들은 쉽게 흘려보내는 걸 잘 포착한다고 여겼다. 착각은 내게서 많은 걸 앗아갔다. 한국 사회의 문화 속에서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나면서.

당신은 누구인가요

Who are you?…

한 남자가 있다.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는 중이다. 어느날 조금 더 독립적인 삶을 살기로 마음 먹은 그는 글쓰기를 통해 자유와 독립을 찾는다. 어느 날, 길을 걷다 자전거와 부딪치는 사고를 당하게 되고, 거기서 알게 된 베아트리체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준다. 그 글에 베아트리체는 매료되었고 그녀가 누군가에게 글을 보여주고, 그가 또 다른 이에게, 또 다른 이에게 보여주다가 많은 출판사를 보유한 사람에게까지 넘겨지고 또 감동을 주어서 출간을 하기에 이른다. 초판은 다 나가고 재판을 찍으며 남자는 유명세를 탄다. 일상은 별반 다를 것 없지만 (길을 걷는다 해도 누군가가 알아보는 이가 없다) 그는 왠지 자신이 순식간에 빌딩의 꼭대기에 올라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 괴리감.  한 여자가 있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동안 정든 가족이 하나둘 세상을 떠났고, 그녀는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하며 새로운 삶을 꿈꾼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는 그녀는 극장에 가게 되는데, 이미 연극의 스토리를 줄줄 꿰고 있던 그녀는 주인공이 마지막 리허설에 나타나지 않은 틈에 서게 된 무대에서 찬사를 받는다. 그리곤 아침에는 연극학교에 가고 오후에는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는데. 여자는 남자의 집에 배달을 간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대화를 하게 되고, 여자는 다음 주에 있을 첫 공연에 들떠 있고 남자는 한순간의 운으로 유명해졌지만 자신에게 재능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걱정에 휩싸여 있다. 여자는 말한다. “나는 당신을 알고 있어요. 당신이 쓴 많은 책을 읽었어요. 당신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당신의 많은 책은 오랫동안 내 유일한 안식처였어요. 내가 어려웠던 시기에 아주 훌륭했던 친구였죠. 때로는 운을 좀 도와야 해요. 내 연극의 무대는 내 것이지만 영감은 당신의 책에서 받은 거예요.”  남자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어떤 고마움을 느낀다. 막연한. 여자는 홀연히 떠나고, 남자는 번뜩이는 무언가를 느끼며 다음 연극무대에서 다시 보자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녀가 전해준 택배상자를 열어보는데. 안은 텅 비어 있다.  “이봐요. 택배 상자에 아무것도 없어요!” “확실해요? 다시 한 번 보세요. 이번에는 운이 좋을 수도 있어요!” 상자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

자신의 삶은 자신이 만들어간다. 삶은 비어있는 상자 같은 것, 그것에 무엇을 채울지는 본인에게 달렸다. 그것에 운을 담을 수도, 자신이 못미더워하는 자기 재능을 담을 수도 있다. 우선은 담고, 믿는 것이다. 나에게는 나의 길이 있고 그것이 괜찮을 수도 있다는. 상자를 믿고 안 믿고는 자신에게 달렸다. 그 안에 온갖 선물이 담겨 있다고 믿는 자와 아무것도 없다고 불평하는 자의 삶은 180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운이나 타인의 평가 같은 것은 텅 빈 상자와 같은 것이니 자신이 해야 할 것을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삶에서 우연히 주어진 것을 감사하라는 의미도 있다. 자신에게 우연히 찾아온 기회로 성공한 남자, 그는 그것이 단지 운일 뿐이며 자신의 재능 없음이 만천하에 드러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러나 그녀는 때로는 운을 스스로 도와야 한다는 말을 한다. 자신을 찾아온 운을 자신이 이용할 줄도 알고 그것에 감사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 지나친 걱정과 근심, 불안은 이미 찾아온 운마저 달아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은 아닐까. 남자는 자신의 책은 많이 팔려도 거리에 나가면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세상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모르겠다고 실토했지만, 여자는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렇게 자신처럼 힘들 때 좋은 친구가 되고 영감을 주고 기쁨을 주는 역할도 한다는 것을. 그러니 자신이 하는 일을 빈 상자를 만드는 일로 치부하지 말고 그것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을 주기도 한다는 걸 말하고 있다.

눈에 띈 댓글 하나.

  • When the man finds out and tells her the box is empty, she asks him to look again. The second time he looks, he understands that it was not a thing that she delivered. What she delivered was hope, love, gratitude and a sense of meaning to his life. What moved the man was the realization that his work impacted, helped, befriended and influenced a life. That realization moved him to work again on his craft with heart and passion.
  • (남자가 상자가 비어 있다고 말하자 그녀는 다시 한 번 봐달라고 부탁합니다. 두 번째로 다시 본 남자는 여자가 전달한 것이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녀가 전달한 것은 희망, 사랑, 감사, 그리고 그의 삶에 대한 의미였습니다. 그가 감동한 것은 자신의 일이 한 삶에 영향을 주고, 도움을 주고, 친구가 되고,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그 깨달음은 그가 다시 진심과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일에 매진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about me

설명

이곳은 제 모든 것이 담길 가상의 집입니다. 존재하지만 결코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없는…

Last updated: 2026-04-29

TIMELINE

유년기

  • 태어나자마자 아토피를 앓았다. 태열이라고 했다.
  • 가난했다. 치료보다 생존이 우선이었다. 집장촌을 떠돌며 살았고 수없이 이사를 다녔다.
  • 아버지는 나의 탄생과 함께 놀며 일하지 않았다.
  • 보다 못한 할머니가 지하 만화방이라도 할 수 있게 지원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었다.
  • 나는 그곳에서 어른 담배 피우는 것 흉내내며 유년기를 보냈다. 유치원이나 동네친구? 내겐 아무것도 없었다. 칙칙한 그늘 밖에는.

10대

  • 초등학생 무렵.
    • 초등학교를 3번 옮겼다.
    • 늘 아버지, 엄마에 기가 눌려 살았다. 엄한 아버지가 두 명 있는 듯한 생활.
    • 초등학교 3학년. 선생님이 엄마를 학교로 불렀다. 애 목욕 좀 시키라고. 엄마는 아토피라고 차마 말을 못했다. 두고두고 마음 아파했다.
    • 축구부에 들었다. 선수를 꿈꾸었다. 혼자만의 꿈이었다.
    • 아버지 지갑에 손을 댔다. 엄마가 내 용돈이라고 모아둔 서랍에도 손을 댔다. 그걸로 친구와 오락실에서 오락했다. 늘 어디론가 도망가버리고 싶었던 걸까? 어느 날 걸렸고, 죽도록 맞고난 이후 집에서 쫓겨났다.
  • 중학생 무렵.
    • 아토피가 심해지면 병원을 갔지만, 의사도 병을 잘 몰랐다. 연고를 바르며 버텼다. 심각한 병인지조차 몰랐다. 모든 걸 너무 가벼이 여겼던 시절.
    • 꿈이 있었다. 한때는 축구선수를, 한때는 작곡/작사를 하고 노래하고 싶었다. 밤을 새워가며 축구를 하곤 했지만 주변 사람에게 단 한 순간도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꿈은 사치였다.
    • 아이들이랑 종종 싸웠다. 유리창을 자주 깨먹었다. 사상공단 안의 학교. 깡패와 양아치가 즐비한 곳. 그곳에서 나도 물들어갔다.
  • 고등학생 무렵.
    • 고1. 첫 남녀공학. 거칠지 않은 사람들. 새로운 세계를 보는 듯했다. 웃고 떠들며 지내는 난생 처음 보는 사람처럼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짝사랑에 빠졌다. 말도 걸지 못했다. 언제나 겉돌았다. 나는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 고2. 그림을 그리겠다고 이 학교에 입학했지만 여러 이유로 학원을 그만두고 학업에 흥미를 잃었다. 원화 배경 그래픽 디자이너의 꿈은 꿈이 거세된 자의 헛꿈일 뿐이었다.
    • 고2~3 즈음.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라며 아버지는 큰고모부 밑에서 독립하려 했고, xxxxx시장에 점포를 차리며(큰고모네에게 x천만원 빌렸다) 동래 복산동의 xxxxx이라는 새집(지하)로 이사했다. 새집에 살며 새집증후군에 걸렸다. 극심한 아토피로 2차감염에 생지옥이 시작된 시기. 아버지 점포도 수익 악화일로를 걸었다. 우리 모두는 할머니, 외삼촌만 축내며 살았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술을 열별 남짓 마시며 미쳐갔다. 동생은 어째서 괜찮을 수 있었을까?
    • 고3 무렵. 2차감염과 심각한 아토피 증세. 사람이 먼저 살아야지요. 담임선생님은 그렇게 말했고, 졸업요건을 맞춰주려고 주변에서 노력해주었다. 나는 혼자 걷지 못했다. 한의원/병원을 다녔지만 그때뿐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살갗이 찢어졌고 진물이 흘렀다. 나느 괴물이 되어 있었다. 병원 가는 날은 지옥이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보며 피하거나 비명지르며 도망갔고, 일부 어르신은 안타까워했다. 그때 심각한 트라우마가 생겼다. 나는 사람이 무서웠고 싫었다. 사람을 피해 숨어들기 시작했다.

20대

  • 20살. 좌안 망막박리증과 수술, 실명. 망막박리증이 생겼다. 눈이 가려워 긁다 못해 두드려댄 대가였다. 수술은 잘 되었으나 시신경에 피가 통하지 않는 관계로… 라는 말을 스스럼 없이 하는 의사. 가족들은 노발대발했지만 나는 넋을 잃었다. 그리고 6개월 이후 심각한 우울증이 찾아왔다.
  • 21살. 우안 백내장 수술. 실명만은 면했다. 입원한 날. 양쪽 눈에 안 보여서 엄마가 밥을 떠먹여주고, 화장실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 아프고 말고의 반복. 우리 집은 슬레이트 집으로 이사갔고, 파산했다. 빚잔치. 내가 만약 괜찮았다면 사채를 끌어당기도록 아버지가 강요했을 것이고, 공사판을 전전하더라도 아버지 빚을 대신 갚도록 겁박했을 것이다. 아파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20대 중반의 나날들.
  • 극심한 아토피로 한때 여러 사찰과 암자에서 요양했다. 20대 초반에 외가의 둘째 큰엄마 쪽에서 경북 쪽에 사찰을 알아봐 주었는데 2주 만에 견디기 힘들어서 내려왔다. 큰 외숙모 쪽에서는 나를 마마보이라고 했고 우리는 침묵했다. 당신도 꼭 걷지도 못 한 채 고통속에서 괴로워해보기를 권한다.
  • 2009년 OKC(치성각화낭종), 2009년 C형 간염치료, 허리디스크 등 여러 치료를 받으며 연명했다. 그래, 연명했다.
  • 2010년? 보다 못한 엄마가 나를 이끌고 xx성당에 갔다. 거기서 사람이랑 조금 어울려 보라고. 약 7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었다. 그전에는 광장공포증으로 길을 못 걸어다녔다. 어떻게든 극복하려 애썼던 시절. 처음 접했던 사이폴엔 같은 면역억제제가 효과가 있었다.
  • xx성당 청년회의 회장이 되었다. 20명 내외를 이끌고 봉사를 다녔다. 수녀원, 아동요양원 등. 나와 다른 세상을 처음 접했다.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나오던 나날.
  • 아토피가 다시 극심해졌다. 사이폴엔(사이클로스포린)이 효과가 없어졌다. 홍천의 사찰로 요양을 갔다. 모든 활동을 접고 은둔에 들어갔다.
  • 동래성당에서 나는 완벽하게 매장되었다. 신부가 앞장섰다. 처음부터 내 눈에 살기가 가득하다며 날 싫어했던 사람이었다. 모두 그를 동조했다. 돌아와서 보니 이미 나는 무책임한 인간 쓰레기가 되어 있었다.
  • 취업준비, 연애 모두 하고 있었지만, 내 안의 자격지심과 불안, 어리숙함으로 모두를 망쳐 버렸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 공무원 준비한다며 다시 고시원,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세상과 단절된 시기를 또 보냈다. 암흑기는 끝나지 않았다.
  • 집에 크게 불이 났다. 죽다가 살아났다. 새벽 3시의 그때. 담배피러 나왔던 그 남자분이 없었다면 절명했을 것. 그러나 그는 119에 신고하고 불을 함께 꺼주다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나는 늘 그처럼 누군가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30대

  • 2014년 > 취업준비
    • 방송통신대학교를 졸업했다. 수능 준비 한 번 못 해본 내게 4년제 졸업장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부산직업능력개발원에 입소했다. 여러 자격증을 땄다. 또다시 팔 접히는 부분이 갈라지고 진물이 뚝뚝 흘렀지만 참았다. 취업 원서를 수백 군데 넣었다. 아무도 연락이 없었다.
    • 연말. 한 스타트업에서 연락이 왔다. 부랴부랴 서울에 올라가 면접을 보았다.
  • 2015년 > 첫 취직
    • 1월 7일. xxxxx에 합격해서 처음 출근했다. 대표는 내가 지낼 방을 구해주었다. 50만원 월세도 월급에 포함시켜 주었다.
    • 콘텐츠 에디터로 사회생활을 차차 익혀나갔다. 언제 동굴 속에 있었냐는 듯. 여러 모임에 참석하며 처음으로 사회에 섞여 사는 나를 발견했다. 서울 곳곳을 돌아다녔다. 인생에는 즐거움도 있구나 하는 걸 처음 느낀 시간.
    • 하반기. 디도스 공격으로 외주사와의 계약이 끊겼고 갑작스레 기획 업무를 맡게 되었다.
    • 기획을 몰라서 헤맸고, 변덕스럽고 자본에 늘 휘청이는 대표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1평 회의실에 갇혀서 온갖 고함과 큰소리를 들어야 했다.
  • 2016년 > 눈수술과 퇴사, 제주
    • 1월. 인생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했다. (도쿄) 엄마가 100만원을 부쳐주었다.
    • 남은 눈이 서서히 안 보이기 시작했다. 모니터는 물론 종이 위의 글자까지.
    • 절망에 빠졌다. 동생이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상암동 원룸에서 지내며 서울김안과, 서울대병원, 아산병원 등을 계속다니며 방법을 찾았다. 김안과는 수술할 수 없다고 했고, 서울대병원은 위험이 높고 재발할 수도 있지만 원하면 수술해주겠다 했다. 아산병원의 윤영희 교수는 믿고 따라라 해주겠다 했다. 그래서 수술을 받았다.
    • 수술 후 퇴사했다. 회사에서는 인사나 총무 같은 역할을 하기를 바랐는데, 집에 찾아온 회사 대표에게 ‘계속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라고 했다. 그렇게 첫 사회생활도 대책없이 끝나버렸다.
    • 동생과 긴 논의를 했다. 이대로는 아니다라며 제주에 터전을 잡으려 이사(애월)를 했다. 동생의 헌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 한라병원의 노건웅 교수에게서 알러지 유발 요인(식재료) 관련 알레르기 치료를 받았다. 인터페론 감마를 주사하는 것.
    • 치료받는 몇 개월 간 너무 힘들었다. 체력이 바닥이었다. 동생과 말다툼이 계속되었다. 안덕으로 이사갔다. 더 깊은 시골이었다.
  • 2017년 > 휴식, 부산 복귀
    • 봄을 만끽했다. 치료는 더는 받지 않았고, 단순히 그곳에서 생활하는 데만 집중했다. 동생도 카페에서 일하다가 쉬기도 했다. 함께 근교로 여행을 다니곤 했다.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부산으로 이사했다. 동생은 대학 졸업을 해야 했다. 나는 운전할 수 없었고, 혼자 있을 수도 없었다. 부산에서 다시 구직생활이 시작되었다.
  • 2018년 > 취업전쟁
    • 지독한 취업전쟁. 수백개의 입사원서, 수십번의 면접, 입사와 퇴사의 반복. 내게는 내 건강과 생활이 유지될 수 있는 일터가 필요했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지 않은 내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 2019년
    • 입퇴사의 반복. 아토피도 심했다가 나빴다 했다. 2017~2019년은 외롭고 고독한 시절이었다.
    • 이 무렵 서울 불광동으로 이사했었다. 인제와 함께 지냈다.
    • 롯데이커머스 xxxx팀에 장애인 특별채용으로 입사했다. (19.08~22.08)
    • 롯데온 통합 프로젝트로 매일 야근했다.
    • 아토피는 신약임상(듀피젠트)으로 진정되었다. 멀쩡한 사람처럼 지냈다. 월 100~200이 들었지만.
    • 퇴사선언. 다들 무시하고 잡일만 떠넘기고, 월급루팡까지 직속상사로 있으며 일감을 몰아치다 못해 파견/계약직과 기획자들 사이에서 중간 고리 역할로 괴로워하던 차였다. 이후 번복과 사과로 완전하게 찍혀버렸고 조직생활이 꼬일 대로 꼬였다. (이후 광명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 2020년
    • 코로나19. 재택근무로 온종일 집에서만 보냈다. 담낭제거술도 받았다. 무력감이 심했다.
    • 파견/계약직 동료들과 이따금 술을 마시거나 저녁을 먹었다. 역시 주류는 못 될 팔자인가?
    • 방이동 -> 천호동으로 이사. 동생은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 일에 치여 야근하고 갑사의 욕받이 노릇만 하다가 내려간 것.
  • 2021년
    • 코로나19 장기화. 비상경영체제. 생활반경은 극도로 좁아졌다.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았다. 가족도 연락 없었다.
    •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했다. 번아웃, 무력감을 호소했다.
    • 일을 하며 이직준비를 했다. 기획공부를 글로 남겼다. 브런치에 글도 여러 개 썼다. 모두 실패했다. 어떤 면접관은 플랫폼을 욕하면서 왜 여기에 입사지원을 했냐며 면박까지 주었다. 플랫폼과 브랜드는 제품의 품질관리, 고객 관계 관리를 등한시하면 망하는데, 중요한 건 모르고 욕한 것에만 눈길을 주니 망하지 않을까? (심지어 욕하지도 않았다)
  • 2022년
    • 팀장이 3번째 바뀌었다. 데이터분석 업무를 잘해내면 원하는 기획업무를 더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운영이든 기획이든 상관없었다. 월급루팡질을 하며 나를 이용하고 욕받이로만 쓰는 직속상사에게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애원이었다.
    • 1~4,5월이 지났다. 잘 해냈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언제나 운영. 언제나 월급루팡 밑에 하수인 노릇. 더는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 8월. 제주에 본부(서울, 부산지사)가 있는 xxxxxx에 추가합격했다. 한번에 합격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많은 이가 말렸지만 이직했다. (말리는 걸 들었어야 했다)
    • 제주 습한 공기로 내려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계속 아토피가 심해졌다. 1-2주도 안 되어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이때 제주에서 방구한다고 동생이 잠깐 제주에 와서 함께 방에서 자게 되었는데… 판교의 xxx에 1차합격했다는 문자를 받아서 고민이라고 했다. 그렇게 고민하다 퇴사하고 다시 서울로 오게 되었다. (최악의 선택)
    • xxx 2차면접 합격. 판교까지 편도 1시간 30분씩 출퇴근했다. 완전한 방임. 밥도 같이 안 먹는 동료들. 뭐하는지 모르겠는 회사. 팀장은 놀기만 하는 인간. 나는 다시 퇴사했다. 들어가는 것이 그토록 어려웠는데도…
    • 9~10월. 암울한 시기. 혼자 공원 산책길을 걸으며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개탄했다.
    • 11월. xxxx에 입사. 마지막 하고 싶은 말을 묻는 xx이사에게 “사람은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경력은 짧지만…” 와 같은 말로 어필했고 그때 고개를 처음으로 치켜들며 나를 보는 그. 그래서 입사하게 되었다. 대표는 그때도 자신은 실무진이 채용하겠다 하면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이후에 2개월도 안 돼서 회사인수된 것 보면 원래 무관심했던 것임이 명백하다)
    • 이사, 박xx과 사업부를 맡아 일을 했다. 서로 다른 성향이라 죽이 맞았다. 다시 할 수 있겠다는 느낌.

40대

  • 2023년 (만 39세, 40세)
    •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허겁지겁 부산행. 구이사는 무감정으로 대했다. (이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 회사가 인수되었다. 입사 3개월 만에 사업부 해체, 프로젝트 드롭. 나는 그 길로 퇴사했다.
    • 방황의 연속. 끝없는 구직 활동이 계속되었다.
    • 5월. 구이사의 복귀 요청. 이전 대표가 구설수로 물러나고 새로운 대표가 왔다 했다. 나는 거절했다. (저들은 나를 이용하기만을 원하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 6월. xxxxxxxxxx에 합격. 그러나 전산실에 배치되었다. 2평의 창고생활. 팀장은 10년째 제자리. 장례지도사를 따로 준비중이라는 말. 미래가 없다는 생각. 전산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을 보고 퇴사했다.
    • 아무런 길이 없어 보였다. 롯데 퇴사 이후에 인생은 더 꼬여만 가는 기분이었다.
    • 8월. xxxxx에서 먼저 연락을 주었다.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었다. 우선 고사했다. 그리고 4개씩 최종합격했던 곳에서 고민했다. xxxxxx에 입사. 그러나 8월 15일을 포함 주말이랑 새벽 할 것 없이 일하는 몇몇들. 그리고 느껴지는 나의 기획/개발 능력에 대한 한계로 다른 곳에 합격통보 받았다고 하며 퇴사했다.
    • 10월. 동생이 선원생활을 접고 서울로 왔다. 더는 이렇게 살지 말자. (이게 2번째다) 한참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얘기했다.
    • 서울 이곳저곳을 다니며 공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고, 그걸 지원해주겠다는 동생의 말에 더욱 힘을 얻었다. 그렇게 부산으로 내려갔다. 기획자로 더는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조금은 서글펐다.
  • 2024년
    • 4월. 상업공간을 보러 다니다 부산대의 한 주택개조상가와 계약했다. 권리금을 3천만원 주었다. (현실인식이 개판)
    • 2달간 공간 정비에 온힘을 기울였다.
    • 6월 오픈 후 2주도 채 지나지 않아 큰 비로 누수가 발생하는 걸 알게 되었다.
    • 건물주는 열쇠수리공. 말이 안 통하는 인간이었다. 누수방지를 하지 않고, 손으로 적당히 때우려 했다. 그 모습에 이걸 더 끌고 갈 수는 없겠다 싶었다.
    • 겨우 1천만원의 권리금을 받고 매자을 넘겼다. 2천만원 손해봤다. 매장을 꾸미는 돈까지 하면 더 큰 손해였다.
    • 8월. 해운대 크리스탈비치 오피스텔에 매장 계약을 했다. 월세가 쌌다. 75만원. 바로 계약했다. 관리비가 30~50나올 줄은 몰랐다.
    • 2개월간 오픈준비. 페인트, 벽에 액자, 공간의 소품과 가구 조립과 배치 등 온갖 준비를 했다.
    • 홍보 마케팅에 애를 먹었다. 인스타를 잘하지 못했다. 알아서 찾아오기 힘든 구조.
    • 꾸준히 피드를 올리다 보니 조금씩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울산방송, 헤이팝 등에서 연락이 왔고 매체에 몇 번 올라갔다. 뮤직비디오 찍으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 연말. 수익이 적어 갈 길이 멀지만 다시 해보자며 힘을 내려 했다.
    • 부산대, 해운대에서 매장을 준비하고 운영하면서 동생과 많이 다투었다.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는가?…
  • 2025년
    • 사촌 형이 6일에 죽었다. 아무도 떠맡으려 안 했다. 큰고모네에서 400만원 병원비만 지불하고 시신은 무연고처리를 해버렸다. 오래전 계모는 사촌형 친부의 자산을 독식했다.
    • 1월 10일. OKC 수술을 했다. 2009년 수술한 게 왜 재발해서 광대 안의 뼈를 다 밀어낼 정도가 되었는지도 몰랐을까?
    • 수술 후에 통증이 심했다. 계속 코피가 났다.
    • 3월 31일. 청주 쪽에 있던 사람에게 매장을 넘겨주었다. 물건 인수값만 받았다. 다시 자연인이 되었다. 뭐해먹고 살지? 그 무렵 즈음에 xxxxx대표에게 문자도 했었다.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지 하고.
    • 4월 21일. 다시 서울로 상경. xxxx에 23일부터 출근했다.
    • 6월 20일 퇴사. 엉망진창. 대표는 내가 알아서 다 해주기를 바랐다. 회사 내에 내분도 많았고. 강제로 퇴사시켜야 할 사람을 못 시키고 닦달하지도 못해서 엉망인 상황. 일이 진전이 안 되어 딜레이만 무한정 발생하여 다수의 퇴사자가 퇴사하겠다고 한 것을 대표가 어떻게든 붙잡아놓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돈은 벌어야 하니 온갖 외주만 받아서 일하는 상황들. 무슨 녹음실 공사하는 인간들부터 뭐하는지 모르는 IT 인력들이 아무렇게나 있다. 문서 하나 작성도 안 하고. 전임자는 의욕을 갖고 뭐라도 해보려 했다가 나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개발대표랑 큰소리치고 싸우기도 했다고. 같은 기획자였던 김xx. 이 사람도 내가 들어오면 퇴사하는 건데 대표가 말려서 그냥저냥 있는 듯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알아서 다 해주고 정리해주기를 바랐다. 롯데에서부터 이어지는 그렇고 그런 뻔한 상황. 너무 질렸다. 그래서 퇴사했다. 대표는 말릴 생각도 없고, 어떻게 조율해보자는 것도 없었다.
    • 6월 말. 이전 회사쪽에서 일하던 구이사, 노xx 양쪽에서 러브콜이 왔다. 어째서? 먼저 연락주었던 구대표가 설립했다는 xxxxx에 7월 1일자로 합류했다.
    • 7~12월. 치매 인지기능검사 솔루션을 플랫폼(인슈어테크)에 미니앱, 모바일웹으로 연결하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휴계약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플랫폼에서 부정적이었고, 솔루션사에서 개발에 미적지근이었다. 원천기술이 없으니 언제나 치이는 꼴이었다.
    • 10~12월. 보험금대신청구 서비스를 개발. 유튜버와 제휴맺고 해보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모르면서 의욕만 앞선 대표. 모르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누군가 해주기를 바라는 인간. 그의 밑에서 손발이 되어주려다 편집술만 늘었다.
  • 2026년
    • 보험설계사를 위한 AI챗봇 서비스 개발. 바이브코딩으로 만들려고 했다. 회사는 개발자 쓸 돈도 없었다. 좀 더뎠고 오류가 많았다. 대표가 만든 것도 합치고 또 수정해야 했다. 개발방향을 말해도 듣지 않았다. 그러면서 요구사항만 많아졌다. 모르면서 해달라고 하는 것만큼 무섭고 진절머리나는 일도 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
    • 연말부터 주체적으로 하라, 사업화가 되면 수익을 쉐어하겠다, 고용관계로 일할 생각없다 등등 가스라이팅이 무한하게 이어졌다. 어느날부터 대표는 마누스AI에 빠져들었다.
    • 3월 17일. 대표는 이번달까지 근무하고 퇴사하라 했다.
    • 4월 16일. 요청한 서류를 겨우 받았다. 해고예고수당은 반만 주겠다고 했다. 나는 서울고용노동청에 신고했다. 그제야 정해진 대로 지급하겠다(5월 15일까지)고 하는 대표. 어른이 애만도 못하다.
    • 4월. 내내 하남 유나이티드병원에서 발목 치료와 입원을 병행했다. 차도가 없다. 류마티스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구직한다는 걸까?
    • To be Continued…

오랜 시간 고통과 열병을 견디며 살았습니다. 블로그에 지난 아픔을 한땀 한땀 도자기에 무늬 새기듯 써내려간 시기도 있었습니다. 아픔을 해부하면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해결하려 들면 언젠가 해답이 보일 줄 믿었습니다. 자연스레 그런 일을 했고 그리 되리라 믿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니체의 말이 맞았음을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심연을 계속 들여다 보면 심연도 너를 들여다 본다는 말. 저는 천천히 악에 잠식되고 있었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은 밝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조금씩 세상의 또 다른 면을 들여다 보고, 따스한 햇살이 주는 안온함도 느껴보고 싶어서 다시 펜을 잡고, 카메라를 들고, 세상 속으로 조금씩 들어가고 있습니다. 무거운 현실은 언제나 바뀌지 않고 괴롭히겠지만, 세상의 다양한 색을 골고루 맛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둠이 있다면 빛도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이 공간의 존재 이유는 곧 저의 존재 이유입니다. 글과 사진은 모두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드러낼 겁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과 저의 단면이 고스란히 쌓이는 곳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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