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 있는 시간

오랜 시간 동안 멈춰 있다. 표지판도 없고 나침반도 없이 해가 뜨고 지는 모습만 보며 제 자리에 덩그러니. 뭘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떤 걸 하고 싶은지 아무것도 모르는 까막눈이 되어, 당장의 내일도 눈앞의 오늘도 어찌할 바를 몰라 눈만 멀뚱멀뚱. 그냥 그렇게 있다.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근 건 아니지만 잠겨 있는 건 맞고, 깊은 동굴 속에 숨은 건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틀어박혀 있는 것도 맞다.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고 감정도 없이 숨만 쉬고 시들어가는 나날들. 살아 있는데 왜 살아 있는지를 모르고, 딱히 살아서 좋은 이유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죽어야 할 이유도 없고 죽어서 좋을 이유도 없는 그런 시간들이다.

40여 년의 세월. 내겐 너무 길었고 끔찍했고 아팠던 나날이었다. 참고 견디고 버티다 보면 조금씩 나아질 줄 알았는데. 지옥 같던 시간들도 세월 속에 점차 옅어지고 무뎌질 줄 알았는데. 많이 아팠으면 다음엔 덜 아플 줄 알았는데. 그만한 내성은 생겼다 믿었는데. 결코 아니었다. 그냥 대책 없이 늙어간 거였어. 내 안의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그저 몸만 아득바득 갉아먹으며 늙어가는 거였지.

악으로 깡으로만 버틴 시간. 그것들이 쌓이고 또 쌓여 마음 한 켠의 어느 구석을 조금씩 갉아먹었네. 망가진 줄 모르고 내달리는 자의 뒷모습은 얼마나 안쓰러운가. 무너지는 줄도 모르고 이를 악물고 나아가는 자 얼마나 위태로워. 근데 그게 나였는 줄은 꿈에도 몰랐지.

머리로 살다가 가슴으로 살려니 뭘 알아야지. 다른 사람들 이야기 듣고 안다는 듯이 떠들고 다닐 땐 그들 인생이 참 쉬워보였지? 머리로만 살면 어찌 어렵겠어. 만사가 다 쉽지. 그런데 막상 악으로 깡으로 참고 견디고 버티기만 하다가 더는 못 버티고 하나씩 무너지니 어때. 무너지는 건 한순간 아니냐.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사랑해. 한 번도 하고 싶은 걸 못하고 살아본 사람이 제 자신이 뭘 원하는지 어떻게 알겠어. 사랑도 받아봐야 줄 수 있고 꿈도 꿔본 사람이 꾸는 거지. 성인 되기 전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삶을 꾸려간 적이 없으니까.. 뭘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는 거잖아.

최악이다. 아픈 곳은 많고 일도 없고 돈도 없고. 주변에 속을 털어놓을 사람은커녕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할 사람도 없는 인생. 애비는 치매라도 매일 술만 마시고 엄마는 무릎이 아작나도 병원 일을 하고, 동생은 매일 몸쓰며 일하는, 도통 수렁 속에서 벗어날 길이 안 보이는 주변까지. 어디 아프다고 병원가면 무슨 뾰족한 수도 없고, 그래도 참고 견디며 일해보겠다 해도 어느 곳에서도 불러주는 이 없는 현실. 더는 못해먹겠다고 다 정리하고 부산가서 책방하려고 할 때 더 강건했어야 해. 막장의 코앞에 있다. 더는 퇴로가 없다. 다 돌아가시고 돈 나올 구멍도 없고 이 몸은 하루가 다르게 망가져간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자. 망하면 끝이다. 그랬어야 했다. 작은 꿈도 못 꿔보고 문제 생기면 고치고 안 되면 땜빵이나 하며 살았던 나날이 자기 마음 하나 모르는 어른아이를 만든 것. 그 모든 실패의 순간이 나를 단단하게 하기는커녕 어중간한 무른 인간으로만 만들었네.

자유와 고립

자유를 원했다. 간섭하지 말길 바랐다. 멋대로 통제하려 들면 강한 반감이 생겼다. 어설프게 묶어두려하면 할수록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모든 발악은 몰개성을 요구하는 사회에 대한 반항이었고, 자기 손 아래 두려는 욕심에 대한 저항이었다.

막상 자유가 주어진 지금, 이토록 막막하고 멍할 수 없다. 사막에 혼자 내던져졌는데 당장 마실 물도 없고, 먹을거리를 알아서 찾아나서야 하고, 뜨거운 햇살을 피해 몸과 마음이 쉴 곳도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데, 모든 것이 고장난 사람처럼 막막하다. 목줄 놓친 주인을 잃어버린 강아지 같다고 할까? 평생 감옥의 독방에서 썩다가 갑작스레 출소한 죄수 같다고 할까? 자유를 외치던 그때에는 어떻게든 자유만 되찾으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젠 녹슬지도 않았는데 멈춰버린 기계가 된 기분이다.

자유가 주어졌지만 고립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40대가 정말 무서운 숫자라는 것, 빚지고 문 닫은 매장이 큰 짐이라는 것, 고장난 면역이 두터운 족쇄라는 것. 새삼스레 그 모두가 무겁게 다가온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아파서 제대로 어른이 되고 자립하는 법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 분명 어른이 되었고, 한동안 잘 살아왔는데 언젠가부터 완전하게 애가 된 기분이다.

정년 기분 탓일까? 잠시 방황하는 중일까? 아니다. 3년 전에도 그랬고 10년 전에도 그랬다. 그토록 큰수술을 하고서도 아무것도 배운 게 없고, 어른의 논리로 회사가 인수가 되고 거리로 나앉았을 때에도 배운 게 없는 것이다. 매 순간 나에게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배우고 그게 나의 피와 살이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든 아프고 힘든 순간을 넘겨버리고 지나쳐온 탓이다. 그러니 말은 인생 다 산 노인처럼 한다는 말을 듣다가도 행동은 여전히 유치원도 못 뗀 어린애 같은 거지.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과연 그런 게 있긴 할까? 고생하는 내내 진절머리나던 인생이어서 지나온 과거를 모두 잊어버리다 못해 생활의 지혜까지 잊어버린 치매 환자가 된 듯해. 그 무수한 세월을 보내고도 나는 나를 모르고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철부지가 되어버린 지금…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하기

나는 내 과거를 증명할 수 없다. 내가 지나왔던 길을 내가 말하는 한 아무런 힘이 없다. 누구에게도 가닿지 못하고, 어떤 사람의 의심도 거둘 수 없다. 지나온 시절마다 만났고 헤어졌던 인연들의 기억, 그들의 잔상 속에 내 모습이 나를 증명한다. 스스로 내뱉는 장황한 설명보다 그들의 기억속의 내 모습을 툭툭 내어놓는 것이 나를 떠받든다. 좋은 사람이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허풍이 아니고 진솔하고 잘 지내왔다고 온갖 말로 풀어내는 것보다 그게 더 효과적이다. 과거는 거짓말해도 과거를 함께 한 이들의 기억속 내 모습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물론 나 자신을 지운 채 주변 사람들에게 휘둘리며, 잘 보이려고 애쓰기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타인과 있든 혼자 있든 그 언제라고 하더라도 나는 온전한 내 모습으로 존재해야 한다. 자연스러움과 솔직함은 언제나 나를 편안하고 슬기로운 길로 이끌 것이고, 나의 기억과 타인의 기억속 내 모습이 비슷할 유일한 길이 될 것이기에. 내가 나를 속이는 순간 모두를 속이는 것과 같고, 내 과거와 내 과거를 함께 했던 이들의 기억도 왜곡하는 일이 되므로… 언제나 나는 나로 살아야 좋다. “네가 너를 설명하는데도 나는 너를 모르겠어” 이따금 그런 말을 듣는다. 도대체 네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너는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느냐 그런 말들. 나도 나를 모르겠다. 너무 현실과 몸의 무게에 짓눌려서 나를 잃어버리고 사는 건지도. 스스로는 내 안의 무가치한 모습과 가치있는 모습이 공존한다고는 느끼는데, 스스로는 좀 더 못난 내 모습에 짓눌려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꾸미려고 꾸미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잘 아는 내 못난 모습이 들키고 싶지 않은 것. 스스로도 한심하다 느끼는 부분을 어떻게든 포장하고 싶은 것. 그래서 조금이나마 내가 쓸모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은 것… 그게 오히려 나를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게 참 싫은데도 그걸 벗어던지기가 쉽지 않아. 언젠가 나는 나로서 괜찮을 수 있을까? 바보같고 한심해도, 늘 아프다는 핑계로 무너지고 괴로워해도 괜찮을 수 있을까? 내가 나를 안아줄 수 있을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그래도 가끔은 누군가가 내게 그래도 괜찮아 라는 말을 해줬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들어.

치명적인 문제

수 년간 말하는 방법, 왜 말해야 하며, 어떻게 말해야 하며, 잘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찾아 다녔다. 매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는 나날이었다. 스스로 재주가 없다고 느꼈고, 내 안에 이야기를 하는 재주는 없다고 느꼈다. 누군가는 그런 나를 두고 ‘당신의 삶 그 자체가 이야기’라 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안에 뭔가가 있기는 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바깥으로 꺼내어 실체화를 할 수 있을지는 몰랐으니까. 끝없이 바깥을 찾아 헤맨 이유였다. 그러나 문득 깨달았다.

내게는 딱히 할 말이 없다는 것을.